독일 비스마르크의 교회탄압 문화투쟁과 카톨릭 교회의 저항운동

 

문화투쟁(Kulturkampf, culture struggle)은 독일 통일 직후인 1870년대에 비스마르크가 국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 1871년에서 1878년에 걸쳐 반(反)프로이센적인 카톨릭교도에 대하여 행한 탄압 정책으로, 프로이센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할과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 아래 계획된 독일의 교회 탄압 정책이었다.

 

 

비스마르크 정부는 문화부에서 가톨릭 부서를 폐지하였으며(1871년), 설교 조항을 폐지하였다(1871년). 비스마르크의 교회 탄압 조항에는 성직자가 자신의 직무 수행에 있어서 국가의 공적인 관심사에 평화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도전할 경우 2년의 투옥 또는 금고의 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수회와 유사한 수도회의 해체와 구성원에 대한 추방 법률(1872년) 및 교회를 적대하는 정책으로, 성직자의 양성과 교육, 교회 순치를 규정하는 5월법(1873년) 그리고 이 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벌금과 투옥하는 조항 등이 삽입되었다.

 

교회 탄압을 위한 학교 감독법은 전체 학교는 물론 종교 교육에 관한 감독권을 오로지 국가가 행사한다는 내용이었고, 교회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원 중단, 바티칸에 거주하는 프로이센 사절의 폐지 그리고 병자 간호에 기여하지 아니하는 수도회의 금지 등의 조항이 삽입돼 있었다.

 

 

이에 맞서 가톨릭 교회는 문화투쟁에 맞서 독일 중앙당을 결성하고 불복종운동이나 반정부 출판활동 등을 전개하며 비스마르크에게 저항하였다. 카톨릭교회 교인들은 가톨릭 주교들을 자신들의 집에 숨겨주거나 도피를 도와주었고, 제국 정부에 대한 반발로 가톨릭 시가행진과 순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문화투쟁 기간에 라인란트 지역의 카톨릭 신문의 수가 30개에서 65개로 급증하였으며, 신문 구독자도 7만 명에서 17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가톨릭 언론매체가 급성장하였다. 정부의 교회 탄압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가톨릭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었다.

 

교회와 정권의 갈등과 대결은 교황 레오 13세의 등장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뮌헨과 비엔나에서 비스마르크와 교황 대사 사이에 개최된 회담에서 문화 투쟁 법령을 폐지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게 되었다. 문화 투쟁으로 입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쇄신되기 시작하였고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비스마르크의 카톨릭 탄압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가톨릭 신자들은 자체적으로 정당(독일 중앙당)을 만들어 대항했으며, 결국 1887년 비스마르크는 카톨릭 교회 탄압 정책을 철회하였다.

 

종교개혁 박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