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교회 김상옥 의사의 1인 전쟁 (201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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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항일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조명하다보면, 순국선열 이름 앞에 ‘열사’나 ‘의사’가 붙은 경우를 보게 된다. 열사는 거사를 도모하며 순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분을 의미하고(이준 열사, 이봉창 열사), 의사는 거사를 도모하며 그 뜻을 이루고 순국하신 분(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을 일컫는다. (대한민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의사와 열사 구분 없이 ‘독립유공자’로 표기하고 순국선열이라 구분한다.)
이 땅에는 자주와 민주,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피의 역사가 있어왔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 독립인사 대부분이 해외로 망명하여 타국 임시처소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할 때, 경성(서울) 한복판에서 열흘 동안 천여 명의 일본 헌병, 경찰에 맞서 시가전을 펼치고 순국한 감리교회의 귀한 인물이 있었다.
▲ 이성아 [저] ‘경성을 쏘다’의 표지 일러스트
김상옥과 동대문교회
한지(韓志) 김상옥은 1890년(고종27년)에 태어나 구한말 군관(軍官)이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3세부터 동대문교회를 다니며(1903) 담임 손정도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신앙인으로 독립운동가의 소양을 키우게 된다. 19세 나이에 철공소를 차려 수완을 나타내고 청소년을 위한 동흥야학(東興夜學)을 설립하였다. 21세에 초대 YMCA 청년부장을 맡으면서(1911)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또 사업에도 성공하여 23세에 철물상회를 세우고 같은 해 정희종 장로의 딸 정진주와 동대문교회에서 결혼(1913)하였으며, 사업가로도 성공하여 동대문 창신동에 이층 건물을 세워 사업을 불려나갔다. 물질에서도 ‘복에 복을 더하사’,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국권이 피탈된 망국의 한이 있었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 압제당하는 땅의 고통을 묻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1919년 3월1일. 항일 만세운동이 터지자, 김상옥 사장은 그간 철공소 문을 닫고 고무판에 찍어낸 태극기를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따로따로 몰래 나가 만세시위에 참여하라고 격려하였다.
‘김상옥 이야기 – 경성을 쏘다’의 저자 이성아 작가는 말한다
“제가 책을 쓰면서 3.1 운동에 대해 디테일하게 복원한 이유가 그거에요.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들을 정말 알려주고 싶었어요. 3.1 운동이라는 게 어느 누가 대단한, 잘난 지식인들 몇 명 – 그 사람들을 따라 민중들을 태극기를 들고 외친 게 아니었거든요. 3.1독립운동 그 날이 있기까지 많은 민중들이 얼마나 가슴 아프게 정말 마음 졸이며… 저는 기록들을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그렇게 엄중한 세월 속에서도 하나씩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 사소한 사건 같지만 그런 속에서 우리 사람들, 우리 국민들의 진심 같은 게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 민족문제연구소 중구지부의 인도로 김상옥 의사 행적지를 답사하며, 6명의 작가와 시민들이 함께하고 있다
3.1만세운동 직후에는 동대문교회 피어슨 선교사 집에서 ‘혁신단’을 조직하고, 동대문교회 지하에서 영국인 피어슨 선교사와 함께 독립의식 각성을 촉구하는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 후에 ‘독립신문’으로 개제(改題) – 성경을 보급하며 재정지원을 맡아 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몇 달 후 일경에게 인쇄시설을 압수당하고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40일 간 모진 고문을 당한 후에 무죄로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한다.(1919) 이를 계기로 김상옥은 비폭력 독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더 적극적인 무장투쟁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 특작부대 의열단에 들어가다
1920년 초, 만주에서 경성으로 잠입한 김동순(북로군정서계열 항일운동가)과 회합을 갖고 만주의 독립군과 더불어 국내에서도 연합작전을 펼 수 있는, 친일파 암살단을 조직하고 사이토 총독과 일본 고관을 암살하려는 거사를 도모하던 중 일경의 정보망에 포착되어,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그는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함께했던 김구, 이시영, 이동휘 등과 합력하고 의열단에 들어가 임무를 기다리게 된다.
1인 전쟁의 승리 – 고군분투한 경성 시가전
1922년 10월 항일문서와 권총4정 실탄 수백 발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12일 독립운동 탄압의 거점이던 종로경찰서 창문에 폭탄을 투척 – 일본형사와 친일신문 매일신보 기자들을 사망케 하고, 일경의 추적을 따돌리며 은신한다. 그러던 중 제국의회 참여를 위해 서울역을 지나는 조선총독 사이토를 사살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기다리다 종로경찰서 무장경관 수십 명에게 포위 된다. 그러나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일경 20여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또다시 사라진다.
양손에 권총 들고 지붕을 날며 총격전을 펼치다
서울역 총격전 이후 종로 효제동 이혜수 동지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이를 감지한 일본 군경은 1923년 1월22일 새벽, 경기도 경찰부장이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이 부지휘관이 되어 경성(서울)의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을 내린다. 수백 명의 기마대와 무장경관이 김상옥 하나를 잡기 위해 종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고 쳐들어왔다. 또다시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지붕을 넘어 다니며 3시간 반에 걸친 대총격전을 펼쳐 관리를 포함 일본 군경 10여 명을 살상하였으나, 실탄이 다하여 마지막 남은 한 발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순국하였다. 이후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열한 곳에 총상을 입고 있었다.
▲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의 이 동상이 바로 김상옥 의사 기념비였다
▲ 마로니에공원 김상옥 의사 동상 하단에 새겨진 당시 언론 기록물
작가들 서울 한복판에서 다이나믹한 실존 인물을 발견하다
지난 30일(토) 비오는 가운데 김상옥 의사의 행적지를 답사하며, 민족문제연구소와 자리를 함께한 작가들은 한 목소리로 “김상옥 의사야 말로 주윤발 액션영화나, 어쌔신 크리드에서나 볼 수 있는 전무후무한 항일 무장투쟁가였음”을 시인하였다.
이렇게 뜻을 모은 작가들은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고 있을 당시, 경성(서울) 한복판에서 1인 시가전을 승리하고 고군분투하다 순국한 김상옥 의사를 주인공으로 – 소설, 시나리오, 만화, 서울시와 함께하는 참여예술 등 컨텐츠로 제작하고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 매년 김상옥 의사의 모교 효제초등학교에서 기념식이 열린다
* 1962년 대한민국정부는 김상옥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확실히 김상옥 의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선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었습니다.” - 강흥복 담임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대문교회)
*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여우훈 감독은 “김 의사는 의로운 삶을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라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의 이름이 귀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에게 행동하는 애국애족의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 대한민국정부는 김상옥 의사의 행적을 기리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교회연합 등 기독교 기관이 집중돼 있는 종로 5가 일대를 ‘김상옥로’라 이름 붙였다.
* 국가보훈처 만화 ‘400:1 총격전의 주인공 김상옥 의사’
바로가기 http://mpva.tistory.com/2566
▲ 1956년 2월 4일 서울동지방 대사경회
▲ 동대문교회 인근의 옛 모습 (기록화)
▲ 동대문교회1935 항공사진 중앙의 성같은 교회건물 – 도봉문화원 제공
▲ 동대문교회1958 항공사진 동대문 우측편에 성 같은 교회건물 – 도봉문화원 제공
▲ 현재 동대문교회가 철거된 터
▲ 24년간 이어져 온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 290명 가운데 제1호가 김상옥 의사였다
당당뉴스 박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