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고종황제 암살과 3.1 독립운동 비사(祕史)

 

왜 3월1일에 일어났나

1월22일에 고종이 승하하고 40일이 지나 3월3일이 국장일로 정해졌다.

이때 모든 지도자들은 국장일에 거사를 하면 전국에서 국민대중이 모여올 것이기 때문에 이때를 기하여 하자는 주장이 많이들 있었으나, 국장을 이용하면 결국은 국왕에 대한 불경이 될 거라는 의사들이 있어서 그러면 3월4일로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루라도 연기하면 거사가 탄로 날 염려가 있으니 일자를 앞당기는 것이 낫다고 하여 그러면 3월2일로 하자고 했으나, 기독교 측에서 일요일 거사는 예배로 인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하여 조급하지만 3월1일로 하자고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28일에는 벌써 선언서가 시내에 몇 장이 돌아다녔으나 선언서에 날짜가 없어서 일본 관헌들도 확인하지 못했고, 그들이 말하는 소수 불령배(不逞輩)들의 농간인 줄 알고 어물어물하면서 무슨 일이 난다는데 하는 정도로 주저하다가 1일에 갑자기 돌발했기 때문에, 관헌들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시위의 준비와 거행

28일 선언서 최종 점검을 위해 천도교 손병희 집(봉황각)에서 최종회합을 가졌다.

1. 이때 박희도가 선언서 발표 장소를 파고다 공원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제의하였다. 3월1일 정오에 모이기로 했다가 2시로 변경하였으나 학생들과 시민이 모였을 때 33인이 체포되어 가는 것을 보면 폭력화될 염려가 있고 이를 구실로 일제에게 어떤 탄압의 구실을 줄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전국 확산은 안되고 서울에서 저지되고 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손병 희가 태화관은 이완용의 저택으로 살면서 나라를 팔아먹던 장소이니 이런 곳 에서 독립을 선언하면 얼마나 뜻 깊으냐 또 음식점이니 모이기도 자유스럽다 하여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오후 2시에 모이기로 장소와 시간을 변경하였다.

2. 선언서와 독립통고서를 총독부에 송달토록 전달 책임자를 이갑성에 선정하다.

3. 서명한 33인은 선언식을 갖고 한사람도 자리를 뜨지 말고 전원이 동일한 행 동을 취하기로 하였다.

4. 경찰에 체포되어도 그 동안의 경과를 감추지 말고 사실대로 정정당당히 주 장하기로 재확인하였다. 이래서 선언식은 민족대표는 태화관에서 학생들과 민중은 파고다 공원에서 나누어 거행되었다.

 

 

1) 1918년 11월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19년 1월18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영토 조정과 전후 새로운 국제 평화․질서 등을 협의하기 위한 강화회의(講和會議)가 열리고 있었다.

 

2) 일본이 편찬한 고종․순종실록의 기록 ‘1919년 1월20일 태왕전하(고종)의 병세가 심해 도쿄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를 보냈다.’ (순종실록부록)

–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 호외 ‘李太王殿下御重患’ (이태왕전하어중환) (1919.1.21)

– 같은 날 매일신보 본판 ‘二十日午後의 水刺도 평일과치진어 오젼한시에돌연즁ㅣ’ (1919.1.21)

– 당시 정계 거물이던 윤치호의 일기 :

“신승희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고종황제가 오늘 새벽 6시쯤 승하했다고 한다. 그런데 매일신보 호외에 의하면 고종황제가 매우 위독하다고 한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 (1919.1.21)

– 매일신보 호외 ‘太王殿下薨去’ (태왕전하훙거) (1919.1.22)

– 같은 날 매일신보 본판 ‘李太王殿下薨去 一月二十二日午前六時’

* 당시 황제가 위중하다는 매일신보의 기사와는 달리 고종은 이미 21일 새벽에 숨을 거둔 상태였으며,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가 감추려는 의도대로 사망시각을 24시간 뒤인 22일 6시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22일은 수정되어야 한다.

 

3) 1919년 1월21일 지병이 없던 고종황제의 죽음을 조선총독부는 뇌출혈이라 발표했지만,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어 고종황제의 독살설은 온 국민의 분노가 되어 거족적 3.1운동으로 이어졌다.

 

4) 일본 왕족으로 영친왕과 혼인한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의 수기에는 고종의 독살내용이 실려 있다. “궁중 전인인 안 모씨가 일본 정부관리로부터 뇌물과 협박을 받고 태황제를 독살하였다 합니다. 일본인들이 태황제를 독살한 것은 마마께서 또 다시 파리강화회의에 대신을 보내시려다 일본 측에 감지 되었기 때문입니다.”

– 고종 죽음 직후 발표된 국민대회 성명서 “친일파들은 윤덕영, 한상학 두 역적을 시켜 식사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리도록 하였다. (1919년1월)”

–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노블(Mattie Wilcox Noble) 여사의 일기 “오늘 오전에, 전 황제의 죽음이 사실은 일본 정부의 사주에 의하여 살해된 것이라는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 (1919.3.1)”

“전 황제(고종)는 격노하여 (한일강제병합을 추인하는) 서명을 거부했고 그러자 서명을 강요하던 이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까 두려워 전 황제를 살해하고, 상궁을 죽였다.”는 일기의 전단지 내용.(1919.3.2)

– 국민회보 “궁녀 둘을 핍박하여 밤중에 식혜에 독약을 타서 드리게 하였고 두 궁녀도 독살 하였다. (1919.3.2)”

–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견한 조선총독부의 사법부장관 구라토미 유자부로의 일기 “테라우치(초대 총독)가 하세가와(2대 총독)로 하여금 이태왕(고종)에게 설명하게 하였지만 고종이 이를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 (1919.10.30)”

– 윤치호의 일기

“홍건이 민영휘에게 들은 바로는 고종황제가 한약을 한 사발 먹고 난 뒤 한 시간도 못되어 현기증과 위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잠시후 황제의 육신이 심하게 마비되어서 민씨가 도착했을 때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고 한다. 황제가 죽어가면서 민씨의 두 손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던지 환관 두 사람이 손을 푸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1919.2.11)

“한진창씨는 고종황제가 독살된 게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그 근거는 이렇다.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1920.10.13)

“(죽은)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이틀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있고 혀가 닳아 없어져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30cm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두 명의 궁녀가 의문사 당했다.” 윤치호는 증언자들과 이를 전해들은 이들의 실명을 모두 기록하였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을 행한 민영달씨가 한씨에게 이 상세한 내용들을 말해주었다.”

(윤치호 : 기독교계 독립운동 거물로 105인사건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일제의 귀족이 된 감리교 장로)

– 손정도 목사의 아들 손원태 박사가 쓴 ‘삼일운동의 기록’과 현순 목사(정동교회 5대 목사)의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기록’에는 “3.1운동은 고종의 밀사인 하란사 여사(감리교 여전도사)와 의친왕(고종의 제2왕자)이 정동교회(Chung Dong First Methodist Church) 손정도 목사의 안내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중국 단둥에서 발각되자 윤덕영이 내시를 교사해 황제를 살해한 것이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문) 기독교대한감리회 김행식 원로목사

(민족대표 33인 김병조 목사의 아들)

(주석) 종교개혁 박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