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태화관 (泰和館) 3.1독립선언과 사회복지의 산실

 

 

태화가 자리잡은 곳은 종로구 인사동. 태화란 이름은 조선 전기 구수영 대감이 연못 위에 지은 정자 태화정(太和亭)에서 유래된 것이다. 다만 한자가 太和에서 太華로 바뀌었던 것이 후에 泰和로 바뀌었으니, 그 뜻은 ‘큰 평화’(The Great Peace)를 뜻한다. 이 이름과 뜻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태화관이 독립선언식 장소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예정대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될 경우 민족대표들을 지키기 위해 청년․학생을 비롯한 민중들과 일본경찰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야기될 것으로 우려되었기에, 파고다공원과 가까운 명월관 지점 – 고급 요릿집 태화관으로 변경된 것이다.

 

▲ 1939년 감리회 여선교부에서 근대식으로 신축한 태화관. (이전의 태화관은 목조건물이었다)

 

손병희는 명월관의 사장 안순환과도 잘 아는 사이였으며 손병희의 부인인 주옥경(朱鈺卿)은 山月이란 기명을 갖고 있던 명월관의 옛 기생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1919년 3월1일. 태화관은 역사적인 손님들을 맞게 되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 33매가 중악 탁자에 놓여 있었고, 종업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민족대표들이 들어섰다.

 

다음은 명월관 기생 이난향(李蘭香)의 증언이다.

이날 아침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점심 손님 30여 명이 간다는 연락을 받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 씨는 손수 나와 아랫사람들을 지휘하며 태화관 안팎을 말끔히 치우느라 바빴다. 하오 1시가 되었을 무렵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 선생이 오신다는 좌석에 기독교, 불교 등 다른 종교계의 인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 대표 한용운 스님이 들어서는가 하면, 기독교 대표 오화영 목사도 들어섰고 오세창, 최린, 권동진 씨 등 보기 드문 손님이 한 방에 모이는 바람에 일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어느 틈엔가 태화정 동쪽 처마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명월관 지점으로 일컬어지던 태화관이 3.1운동의 민족대표 독립선언식 장소가 되면서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부담스러워한 인물이 있으니 태화관의 건물주였던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자기 소유 건물에서 반일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사실을 큰 부담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태화관 저택을 매물로 내놓았다. 워낙 규모가 큰 집이라 큰 부자가 아니면 재원이 든든한 단체라야 살 수 있었다.

 

이완용에게서 이 건물을 매입한 새 주인이 감리교 여선교부였다(남감리회 여선교부 Woman’s Missionary Council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하느님의 놀라우신 계획 아래 3.1독립운동으로부터 한국감리회 사회복지사업의 중심. 국내외 사회복지사업을 실현하는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이 위치한,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9)

 

종교개혁 박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