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회 강북지방 기독교 독립운동 사적지 ② 이회영 권사 가문과 이시영 선생 묘역

 

이회영 (1867.04.21~1932.11월.17) 양반가의 자제로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사상을 접하면서 유교사상에서 기독교사상으로 개종한다. 1906년 아버지 사망 후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 해방시켰다.

 

 

감리회 권사 가문으로서, 1910년 12월, 6형제가 한겨울에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가산을 정리한 돈으로 (600억) 대한민국 육군의 모체가 되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 백두산  서쪽 기슭에  백서농장과 병영을 건설하고 농업과 군사훈련을 받던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제공)

 

이회영 권사의 사인은 1932년 고문치사에 의한 죽음으로 알려져 있다.  일경은 고문 행위를 숨기려고 쇠창살에 목매 자살했다는 낭설을 퍼트렸다.

사망 당시 일본 영사관 당국은 체포된 이회영 선생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발표했으나, 그의 유해에는 “안면에 선혈이 낭자하고 타파오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과 서둘러 그의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수상한 행적들이 기록으로 남아 일제가 독립운동의 거두를 고문치사로 죽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회영 선생의 시신은 일제에 의해 화장된 뒤 유골 형태로 유족들에게 인계되었으며, 오늘날 동작구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위치한 우당 이회영 권사의 묘

 

이시영(1868.12.03~1953.04.17) 선생은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한 이회영 가문 6형제 중 유일한 생존자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시영 역시 만주로 망명하기 전 첫째 형 이회영을 따라 서울지역의 교회를 출입하면서 전덕기 목사 및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시영은 대종교를 중히 여겼던 사람으로, 강북지방의 이시영 묘소는 기독교사상으로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실천한 이회영 가문을 기념하는 데 의의가 있다.

 

▲ 광복 후 신흥무관학교 출신 들이 신흥학우단을 복원하고  성재 이시영 선생(중앙의 흰 옷)과 함께 하였다.  (우당기념관 제공)

 

사적 위치 : 서울 강북구 수유동 통일교육원(강북구 수유동 535-353)에서 둘레길 따라 도보로 8분 거리에 성재 이시영 선생 묘가 위치

 

종교개혁 박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