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회 강북지방 기독교 독립운동 사적지 ④ 우이교회

 

서울연회 강북지방의 우이(牛耳)교회는, 구한말 1909년 6월 6일 설립된 109년의 역사를 지닌 교회다.

 

당시 동대문교회를 중심으로 서울 동북부지역 선교를 지휘한 벙커(D.A.Bunker) 선교사는 소귀교회 창립 보름 전, 미국 선교부로 보낸  1909년 5월 17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는 동대문 밖에 있는 한 마을에 가서 그 마을 첫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부부였습니다. 1년 전쯤 남편은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그 남편은 생활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큰 짐이었고 그와 접하여 사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중 교인들이 그를 만나게 되었고, 교인들은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사내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회복하게 되자 그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어제 그와 그의 아내 및 어린 세 자녀들이 흙으로 개어 만든 제단 앞에 선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모두들 감격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얼마 후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이들은 장차 이 마을에 세워질 교회의 설립교인이 될 것입니다.』

 

▲ 벙커 (D.A.Bunker, 房巨) 선교사 부부 합장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

 

1909년 6월 6일 창립된 소귀교회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기까지 독립된 구역회(區域會・Circuit)가 되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구역은 동대문구역(1909~1911), 미아리구역(1912~1930), 돈암리구역(1931~1932), 창동구역(1933~1938), 월계리구역(1939~1943 폐교까지)으로 바뀌면서 존속하였다.

 

구한말 창립된 소귀교회(우이교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1940년대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과 마찬가지로 암울한 시기였다.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킨 일제는 군부통치 체제를 구축하고, 식민지 조선에 대한 종교・사상 통제를 강화하였다.  신사참배 강요, 친일 어용교단 설립을 강요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교인들은 교회 밖으로 추방되거나 투옥되었다.

 

이같은 암울한 시기에 우이동교회(1931년 소귀교회에서 우이동교회로 명칭 변경)도 1941년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40년 월계리구역과 우이동교회에 부임한 제19대 담임 이창선 전도사를 마지막으로 우이동교회는 일제강점기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제암리교회 순교 현장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일제의 교회탄압은 서울 변두리에 있던 소귀교회(우이교회)를 비켜가지 않았으며, 소귀교회에도 왜정의 교회탄압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1년 간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제7대 담임 최주익 전도사 이후에는 1917년에 소귀교회 제6대 담임이었던 최도익 전도사가 1919년 제8대 담임으로 다시 부임하여, 3.1운동 이후 수습 등으로 1년 동안 애를 쓰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우이동교회는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첫 번째 순교자가 된 강종근 목사가 전도사 시절 1933년 제16대 담임으로 부임한 곳으로, 1934년 우이동교회가 12칸 새 예배당을 마련한 것도 강종근 담임전도사 때였다.

 

▲ 일제강점기 신궁에 신사참배하는 모습

 

강종근 목사는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창동구역과 우이동교회를 담임한 후, 1940년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며 신사참배에 저항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으로 강 목사를 구속하였으며,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였다.  그러나 형무소에서 받은 고문과 악형으로 그의 신병은 약해졌고,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이틀만에 사망하였다.

 

그는 임종시 아내 윤희성 사모에게 “나는 주를 따라가니, 마음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1942년 6월 3일 숨을 거두었다.  윤희성 사모는 이후 아현동에 신성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장로로서 교회를 섬겼다.

 

▲ 제16대 담임 강종근 목사(1904.9.26-1942.6.3) 협성신학교(현 감신대) 졸업 후 전도사 시절 첫 부임지가 소귀교회였다.

 

1929년부터 미아리교회, 월곡교회, 우이교회, 창동교회 등 네 교회를 담임한 이규갑 목사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으로 구한말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고 흑령강성 독립군 양성소를 운영한 독립운동가였다.

이후 1922년 귀국하여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1924년에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아 시베리아 한인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해외 독립운동과 해외 한인선교에 헌신했던 그가 귀국하여 1929년 부임한 교회가 소귀교회였다. 이규갑 목사는 이미 목사 안수를 받았음에도 본처전도사(협동회원) 자격으로 교회를 맡았는데, 이는 그의 신분이 공개될 것을 우려한 교회 측의 배려로 추정된다.

 

▲ 제14대, 제17대 담임 이규갑 목사(1888.11.5~1970.3.20)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일제는 종교활동을 탄압하여 우이동교회를 폐쇄한다.  일제강점기 우이동교회에 대한 마지막 정보는 1938년 감리교 총리원에서 기록한 동부연회 경성동지방에 속한 교회 현황이다.  1938년은 우리민족과 한국교회의 일제 말 수난기를 드러내는 시기였다.

 

유상렬 본처전도사(本處傳道師)가 마지막까지 우이동교회를 지켰으나 폐쇄를 막을 수 없었고, 창동구역, 월계리구역으로 전전하며 명맥을 유지하려던 마지막 노력도 태평양전쟁 기간의 집회금지조치로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남은 교인들은 가정에서 신앙을 지켜내야 했다.

 

▲ 일제말기 우이동교회 예배당 (1934년 우이동교회가 새로 건축한 예배당)

 

1941년 일제 말기 우이동교회가 폐쇄될 때 마지막까지 교회를 지켰던 신도 가족들은 해방 이후 인근에 생긴 그리스도교회와 장로교회로 잠시 출석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모두 폐쇄되었고, 1954년까지 이 지역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미아동교회(현재 돈암교회) 오이용 권사 가족(이들은 우이동에 살면서 10km를 걸어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이 주도한 우이동기도처에서 1954년 10월24일 개척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에 기존 우이동교회 유상렬 전도사 가족이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감리교회의 맥을 잇는 우이동기도처가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고, 1955년 5월 4일 재설립예배를 드림으로, 오늘날의 우이교회가 다시 세워지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 박은석 기자